그해 가을, 조금 이른 단풍을 만나기 위해 나는 일본의 작은 전통 도시 다카야마(高山)로 향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계절이 있다고 하던데, 내게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가을을 깊이 들이마시고 싶었다. 너무 크지 않고, 너무 시끄럽지 않고, 너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도착한 곳이 기후현 다카야마시였다.
첫날 – 산마치스지, 나무의 냄새가 스며드는 골목
다카야마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건 공기의 결이었다. 맑고 차분한, 도시의 바람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공기. 짐을 맡기고 천천히 산마치스지(三町筋) 골목으로 향했다. 이곳은 옛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로,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길 양옆으로는 검은 목조 건물이 줄지어 있었고, 입구마다 간장 장아찌, 고헤이모찌, 히다 소고기 꼬치 같은 향긋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천천히 걷다 보니,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이 아직 낯설어 보였다. 본격적인 단풍철은 아니지만, 초록과 노랑이 섞인 나무들이 조용한 계절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작은 찻집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전통 다다미 방과 서서히 내려오는 햇살, 그리고 창밖의 골목이 어우러져, 말차 한 잔이 그 어떤 호텔의 뷔페보다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말차의 씁쓸함과 함께 나온 밤 화과자의 달콤함이 입 안을 채우고, 눈 앞 풍경이 그대로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둘째 날 – 아침시장, 소소한 풍경 속에 머무르다
다카야마의 아침은 특별하다. 이른 아침, 나는 미야가와 아침시장(宮川朝市)으로 향했다. 강을 따라 줄지어 선 가판들엔 신선한 채소, 과일, 손수 만든 장아찌와 공예품들이 놓여 있었다. 상인들은 부지런히 물건을 정리하면서도,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꼭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넸다.
한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왔냐고 묻더니, “요즘은 외국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반가워요.”라며 직접 담근 시소장아찌를 내밀었다. 작은 봉지에 담긴 그 장아찌는 여행 마지막 날까지도 가방 안에서 내내 그 향을 품고 있었다.
시장에서 아침으로 먹은 건 히다 소고기 꼬치구이와 따끈한 된장국. 꼬치에 꽂힌 고기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육즙과 그릴의 불맛이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기와 함께 나온 히다 미소 오니기리는 짭조름하면서도 구수했다. 소박한 한 끼였지만, 지금까지 먹은 어느 아침보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시장 옆 구마노 신사(熊野神社)에 들렀다. 아침 햇살이 신사의 토리이를 비추고 있었고, 바닥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경내에서 조용히 종을 울리고, 손을 모았다. 비는 건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의 고요함에 감사했다.
셋째 날 – 히가시야마 산책길, 걷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간
마지막 날, 나는 히가시야마 산책길로 향했다. 이 길은 다카야마 동쪽의 사찰과 무덤, 작은 숲길을 잇는 산책로다. 가을 햇살이 낮게 내려앉은 아침, 발걸음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품은 소지지(素智寺), 엔코지(円光寺) 같은 절들이 길을 따라 펼쳐져 있었고, 단풍은 서서히 진해지고 있었다.
산책길을 걷는 동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닌, 풍경 안에서 머무는 기분이 들었다. 돌계단에 앉아 물병을 꺼내 마시며 숨을 돌리던 그 순간,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 몇 개가 내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고, 나도 그냥 그대로 두었다. 이토록 사소한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책길 끝자락의 작은 찻집에서 마신 유자차 한 잔. 구마모토 출신이라는 사장님은 이 지역에서 10년째 살고 있다며 “다카야마는 단풍보다 단풍이 되기 전이 더 아름다워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깊이 박혔다. 어쩌면 나도 지금, ‘단풍이 되기 전’의 나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열차 안, 머릿속을 맴도는 풍경들
다카야마를 떠나는 길, 열차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창밖으로는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었고, 집집마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무에 감이 매달린 모습이 왜 이리 정겹게 느껴지는지. 마을의 지붕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오늘도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는 SNS에 올릴 ‘인생샷’도, 자극적인 명소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고’ 떠난다. 조용한 골목의 감정들, 눈인사 하나의 따뜻함, 입 안에 머문 고기의 온도, 오래된 절의 향기, 그리고 바람이 흔들던 나뭇가지의 리듬.
가을이 시작되는 이 시기에, 나는 다카야마에서 나 자신과 다시 만났다. 떠나기 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조금 더 차분한 시선으로. 이 도시의 속도에 맞춰 걷다 보니, 어느새 나도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가을이 오면, 또 다시 이곳을 찾고 싶다. 단풍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되기 전의 다카야마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