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던 어느 날, 나는 지도를 펼쳐보다가 눈에 들어온 도시가 있었다. 중국 윈난성의 리장(丽江). 이름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골목과 돌다리, 그리고 낮은 지붕의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나를 끌어당겼다. 가을이 막 시작된다는 고도가 높은 도시, 밤낮의 온도차가 감정을 깨우는 곳. 나는 그곳으로 떠났다.
첫날 – 구시가지 산책, 돌길 위를 천천히 걷다
리장공항에 도착한 오후,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부드러웠다. 숙소는 리장 고성(丽江古城) 안의 작은 게스트하우스. 돌길과 목조건물이 이어지는 골목 끝에 자리한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마을처럼 조용했다.
짐을 풀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마을은 낮은 담장과 붉은 벽돌 지붕이 이어졌고, 양쪽에선 국화와 말린 옥수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돌길에 쿵쿵 울리는 내 발소리 외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돌 바닥 위로 초가을 햇살이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구시가지 중심의 스이허우 강(四方街) 근처에서, 나는 작고 오래된 찻집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은 “혼자 여행이세요?”라고 묻고는 미소 지으며 보이차 한 잔을 권했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에 감싸니 온기가 손끝을 넘어 마음까지 번졌다. 찻집 안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벽엔 오래된 수묵화와 나무 서판이 걸려 있었다.
그날 저녁, 전통 야오볜로우(腌腊肉, 훈제돼지고기)를 맛보았다. 숯불에 구운 고기와 윈난식 마늘소스, 그리고 따뜻한 쌀국수 한 그릇. 입안에 퍼지는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이방인의 허기를 부드럽게 달랬다. 조명이 흐릿한 골목에서 혼자 걸어 돌아가는 길, 가을밤의 찬 공기가 살갗을 스쳤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날 – 옥룡설산 아래의 조용한 마을, 바샤를 걷다
이른 아침, 나는 택시를 타고 리장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바샤 마을(白沙古镇)로 향했다. 이곳은 상업화되지 않은 나시족(纳西族)의 전통 마을로, 관광객도 거의 없고 마을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흙길과 조용한 집들이 펼쳐졌다. 바깥 벽에 대나무를 기대어 놓은 집, 햇살 아래 말린 옥수수와 붉은 고추, 그리고 마당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할머니. 모든 것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걷다 보니 오래된 벽화가 그려진 바샤 고벽화당에 도착했다. 이곳은 14세기경 나시족이 남긴 壁画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 조상 숭배, 춤과 음악이 그려져 있다. 해설을 듣진 않았지만, 벽 앞에 조용히 서 있으니, 오히려 말보다 강한 울림이 전해졌다.
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윈난식 팥죽과 찐 옥수수, 그리고 달콤한 자몽차였다. 사장님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한국 손님 오랜만이네요.”라며 마른 자몽껍질을 선물로 건네주셨다. 혼자 먹는 식사였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 평화로운 리듬에 나를 맞추고 싶어졌다.
셋째 날 – 블루문밸리와 작은 인연
셋째 날은 옥룡설산(玉龙雪山) 아래에 있는 블루문밸리(蓝月谷)로 향했다. 초가을의 설산은 이미 봉우리에 눈을 덮고 있었고, 골짜기 아래 물길은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계절의 경계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풍경. 마치 여름과 겨울이 악수하는 장면 같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데, 옆에 앉아 있던 한 중국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쓰촨성에서 온 회사원이라며, 혼자 여행 중이라고 했다. 우리 둘 다 혼자였고, 말은 완벽히 통하지 않았지만, 스마트폰 번역기와 웃음으로 대화는 계속되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차 한 잔을 나눴다.
그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곳은 사람보다 자연이 주인인 곳입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곳의 주인은 강물이고, 산이고, 바람이다.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손님일 뿐.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감사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 블루문밸리의 고요함이 마음 깊숙이 내려앉았다. 사람과의 짧은 인연도, 자연과의 긴 대화도 모두 풍경이 되었다. 초가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너무 춥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은, 마음이 가장 유연해지는 계절.
마지막 날 – 떠나는 아침, 고요한 숙소 창밖으로
리장을 떠나는 아침, 숙소의 창밖으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노랗게 물든 담쟁이덩굴, 빨래를 개고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민속 음악. 나는 짐을 싸면서도, 창밖을 몇 번이나 바라봤는지 모른다.
이 여행에서 나는 특별한 관광지도, 유명한 맛집도 많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한 차 한 잔, 낯선 이의 인사, 가만히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들이 쌓여 여행이 되었다.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었고, 잊고 있던 감각들이 돌아왔다.
리장은 조용하지만 풍부한 도시였다.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품어주는 곳. 한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는 자연과 거리, 사람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또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땐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초가을의 리장은, 나에게 여행이란 '천천히, 조용히, 깊게' 가는 것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