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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헝가리 에게르 여행기 (성곽, 온천, 와인 도시)

by love007 2025.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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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를 여행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는 아마도 부다페스트일 겁니다. 아름다운 다뉴브 강과 국회의사당, 온천 스파와 고풍스러운 거리들까지. 하지만 헝가리에는 부다페스트만큼이나 깊고 조용한 매력을 지닌 소도시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북부에 자리한 에게르(Eger)는 단연 특별한 도시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역사와 문화, 온천과 와인,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함까지 모두 담고 있는 이 도시는, 헝가리의 정수를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역사의 무게를 품은 성곽도시, 에게르

에게르를 처음 만나는 순간 가장 눈에 띄는 건, 도시 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에게르 성(Eger Castle)입니다. 성벽은 낮고 두껍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습니다. 1552년, 오스만 제국의 4만 대군이 헝가리를 침략했을 때, 이곳 에게르 성에는 단 2천 명의 수비대가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워 마침내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이 전투는 이후 헝가리 민족의 상징적 승리로 기억되며, 에게르는 ‘영웅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죠.

성 안에는 당시를 재현한 전시관과 박물관, 중세식 무기 전시, 그리고 전망대가 있습니다. 성벽 위에 서면 붉은 기와지붕이 촘촘히 이어지는 에게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에게르 계곡과 포도밭들이 펼쳐지죠. 바람을 맞으며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중세와 이슬람의 공존, 독특한 도시 건축

에게르의 중심부를 걸어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다양한 시대의 문화를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고딕 양식의 교회 바로 옆에는 터키식 목욕탕이 있고, 바로 옆 골목에는 바로크 스타일의 시청이 있죠. 가장 흥미로운 건 미나레(Minaret)입니다. 높이 약 40m의 이슬람 탑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절(1596~1687)에 세워졌습니다. 헝가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미나레 중 하나이며, 유럽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이슬람 건축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종교적 기능보다는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어 관광객들이 종종 좁은 나선형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전망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 과정 자체가 흥미롭고,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에게르 구시가지는 어떤 고요한 시 같기도 합니다.

이처럼 에게르는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 중세와 근현대가 섞여 있는 도시입니다. 인위적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만들어낸 도시의 결이죠. 그래서일까요? 에게르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도시입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되고, 구경보다는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그런 곳입니다.

“황소의 피”를 마시다, 와인의 도시 에게르

역사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면 이제 에게르의 또 다른 자랑거리, 와인을 맛볼 차례입니다. 헝가리는 원래 와인이 유명한 나라지만, 에게르는 그중에서도 특히 레드 와인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이곳의 대표 와인은 에그리 비카베르(Egri Bikavér), 즉 '에게르의 황소의 피'라는 뜻을 지닌 레드 블렌딩 와인입니다.

이 와인은 단일 품종이 아니라 여러 품종을 혼합해 깊고 풍부한 풍미를 자랑합니다. 과거에는 싸고 진한 테이블 와인 정도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품질을 크게 개선해 국제 대회에서도 수상하는 등 명성을 되찾고 있죠. 특히 와인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소규모 와이너리에서는 정말 놀라운 품질의 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면 '와인의 계곡(Valley of the Beautiful Woman)'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수십 개의 와인 셀러가 동굴처럼 파여 있어, 그 안에서 각종 와인을 시음하고 구입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한 잔에 300~500포린트 정도면 맛볼 수 있으며, 가족 단위로 운영되는 셀러에서는 집에서 만든 치즈나 빵과 함께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와인 두 병쯤은 가방 속에 들어 있게 되죠.

터키식 하맘에서 즐기는 진짜 온천

에게르는 와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여기에 온천 문화까지 더해집니다. 헝가리는 온천의 나라로 유명한데, 에게르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터키식 하맘(함맘)으로 알려진 온천 목욕탕은 단순한 힐링 공간을 넘어 문화적 체험 그 자체입니다.

대표적인 곳은 에게르 터키 목욕탕(Egri Török Fürdő). 400년 전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사용된 이 목욕탕은 돔 형태의 천장과 대리석 바닥, 그리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으면, 물소리와 함께 조용히 과거로 흐르는 듯한 감각이 들죠. 여러 개의 탕과 사우나, 마사지 시설도 있어 하루 일정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이곳이 여전히 현지인들의 일상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평일 오후에 가면 여행객보다도 동네 어르신들이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죠. 이런 순간이야말로 '여행자'가 아닌, '현지의 하루'를 잠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배고플 틈 없는 도시, 정겨운 헝가리식 식탁

에게르에서는 식사도 여행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워낙 식당도 다양하고, 전통 헝가리 요리를 잘하는 집이 많기 때문이죠. 가장 기본이 되는 요리는 역시 굴야시(Gulyás). 소고기와 감자, 양파, 파프리카를 넣고 푹 끓인 스튜는 적당히 매콤하고 진하며, 빵과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입니다.

또 하나 추천하는 요리는 렉쵸(Lecsó). 파프리카와 토마토, 양파를 기름에 볶아낸 요리로, 소시지를 넣거나 달걀을 더해 든든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특히 여름철에 제철 채소로 만든 렉쵸는 그 풍미가 살아 있어 지역 사람들도 즐겨 먹습니다.

전통 소시지 요리인 호르카(Hurka)도 빼놓을 수 없죠. 간, 쌀, 향신료를 섞어 만든 이 소시지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포도주와 함께 먹으면 완벽한 현지식이 됩니다. 디저트로는 팔라친타(Palacsinta)를 꼭 드셔보세요. 얇게 부친 크레페에 잼이나 초콜릿을 바르고 돌돌 말아낸 이 음식은 커피와 함께 최고의 마무리가 되어줍니다.

마무리하며 - 조용한 도시가 남기는 깊은 여운

에게르는 화려한 도시가 아닙니다. 유명 관광지가 가득한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 담긴 진심, 오래된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 그리고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떤 관광지보다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성곽에서 바라보던 붉은 지붕들, 와인 셀러의 웃음소리, 따뜻한 온천탕의 수증기, 소박하지만 풍성한 식탁…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 도시는 여행자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혹시 당신이 다음 헝가리 여행에서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진하게 그 나라를 느끼고 싶다면 꼭 에게르를 기억해 주세요. 어쩌면 그 여행의 가장 따뜻한 기억은, 이 조용한 도시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손잡이가 있는 평편한 나무 위에 몇개의 치즈 조각과 3개의 유리잔에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와인이 담긴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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